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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하피2024-01-30 21:55
카테고리긴 글
작성자 Level 10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채점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상보다 더 어려웠다. 두 번째 시험이었고, 두 번의 시험을 준비하며 치른 수많은 모의고사들이 있었다. 그래서 확신이 있었다. 이번 시험은 매우 어려웠던 만큼 내 점수는 실망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뉴스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 수능 난이도는 작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전반적으로 평이하게…”


시험을 치르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안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급기야 어머니는 방바닥을 내려치듯 재수 헛시켰다는 말을 던지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확신에 찬 기자가 쏟아내는 말 앞에서 나는 자신 없게 “아닌데, 어려웠는데…”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TV 안팎에서 문제를 가장 많이 풀어왔던 사람은 나였는데도 말이다.


다음날 앵커는 같은 표정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 수능 어려워”, “전년 대비 상위권 점수가 10점 이상 하락” 등등의 자막이 TV의 하단에 흘렀다. 재수생들이 대부분 작년보다 점수가 하락했다는 소식을 듣던 어머니가 “우리 아들이 잘 본 거구나.” 하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신 것을 기억한다. 나는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 대상은 내 어머니가 아니었다. 나는 언론에게 분노했다. 잠깐 다룬 어느 수험생의 투신 소식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그의 하루 시간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시험을 치고, 채점을 하고, 나쁜 성적을 확인하고, TV에서 난이도가 쉬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어쩌면 밤새 울다가 새벽녘에 그는 어딘가 높은 곳을 향해 올랐으리라. 각 학교에서 가채점 결과를 수합해 결과를 예측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하루. 그 하루를 기다리지 않고 섣부르게 쉬웠다는 기사를 내서 사람을 떨어뜨렸다. 사과 한 마디도 없었다. 그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어제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성적표가 나오고, 원서를 쓰고, 재수 생활을 끝냈다. 구체적인 성취를 이룬 시기였지만 마음은 늘 복잡했다. 해소되지 않은 분노가 바닥에 꿈틀대고 있었으니 그 위에 쌓인 마음이 평온할 리 없었다. 국가와 교육 시스템에 화를 내다가 불쑥 알지 못하는 어느 가정의 부모에게 성내고 있었다. 그러다보면 그 부모도 자식도 한없이 불쌍해졌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 속아서 이렇게 거스르기 어려운 문화를 갖게 되었나? 추락한 이를 외면하면서 아무 것도 보장하지 않는 성공을 기뻐해도 되나? 질문을 품은 채로 치른 입학식은 재수로 깎여 나간 자기애를 채워주지 못했다.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날씨가 추워지고 입시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에 흘러나올 때면 나는 종종 멍하니 그 시절로 돌아간다. 내 자식 어깨에 날개가 돋을 것이라고 믿었던 가엾은 부모를 볼 낯이 없었던 하피는 아직 깃이 온전히 자라지 않은 팔을 저으며 비상했을까? 날개가 되어 버린 손은 무얼 잡을 수도 없어서 홀가분하게 발을 뗐을까?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되 사람의 말로 대화할 수 없는 작은 괴물은 가족을, 마을을, 나라를, 세상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 말 대신 몸을 던졌던 건 아니었을까? 과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의 자리에 나를 자꾸 세울 수밖에 없었다. 공부도 무엇도 답답하던 노량진 입시학원을 불현듯 뛰쳐나와 한강 다리 중간에서 코를 훌쩍이던 나는 그와 많이 다르지 않았으니까.


딸기도 앵두도 살구도 사과도 다 제철이 다른데 유독 한 계절에만 결실을 맺으라는 세상은 그 이전의 많은 그와, 그 이후의 많은 그를 그저 낙과로 여기고 지나쳐 간다. 그랬다더라 하고 구전되는 옛 이야기가 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열심을 내어 그를 기억한다. 어느 하피가 또 제 둥지를 잃지 않도록 그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2024. 1. 23. 와우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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