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우리는 부동산으로 돈 벌 팔자가 아니야.” 그렇게 한 마디 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우리가 팔고 나온 아파트의 시세가 고작 6개월 만에 두 배 가까이 뛰었다는 소리에 우리 부부는 그렇게 쓴 웃음 한 번 짓고 넘겼다. 더 비싸게 팔았으면 돈이 더 생겼겠지만 지나갔는데 뭘 어쩌겠나. 남들은 두고두고 생각나고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지면서 속상해 한다는데 우리는 잠만 잘 잤다. 서로 너무 잘 자서 밸도 없다고 키득거렸다. 샀던 가격 그대로 팔았으니 손해를 본 것도 아닌데 억울할 일도 아니지. 그렇게 두어 번 더 언급하고는 그냥 그렇게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일이 되고 말았다. 넉넉한 집 자식이 아니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옷은 물려 입고, 음식은 - 특히 밥풀은 - 남김이 없어야 했다. 세탁기며 냉장고는 물론이고, 냄비며 밥그릇, 국그릇도 일단 우리 집에 들어오면 살아서 나갈 생각을 버려야 했다. 내 나이보다 많은 살림살이들과 서로 정답게 위로하며 살다가도 학교 준비물이나 책 같은 것들을 사야 할 때 부모님의 한숨이라도 듣게 되면 죄 지은 기분이라 용돈을 따로 받아 본 적도 거의 없다. 그렇다고 또 모자라고 부족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어머니는 집에서 별 걸 다 만들어 주셨다. 프라이팬에 구운 빵이나 손으로 빚어서 튀긴 도넛과 같이 간식을 해 주시기도 했고, 시장에서 일하셨던 아버지가 사 오신 재료들로 온갖 요리들을 하셨기 때문에 먹을 걸로 아쉬운 일은 없었다. 심심할 때면 읽었던 책을 또 읽었고, 세뱃돈으로 산 100원짜리 조립식 장난감 몇 개만 있으면 머릿속에서 몇 편이고 만화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날씨가 포근하면 뒷산에서 개구리를 잡아다가 경주를 시키기도 하고, 약수터에 누군가 세워 놓은 철봉에 매달려 대롱거렸다. 부유하지 않았지만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가난이 피부로 와 닿기 시작한 건 군대를 전역한 직후부터였다. 아버지가 간경화로 더 이상 시장에 나가실 수 없게 되면서 치료비와 생활비가 당장 급해졌다. 2년을 내리 휴학을 하고 학원 강사를 했지만 복학할 때 학비는 대출을 해야 했다. 더 졸업을 미룰 수는 없어서 수업 마치면 학원으로 달려가는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래도 주머니에 천 원짜리 몇 장 없을 때가 많았다. 천 원에 세 개 하는 빵을 팔던 경희대 앞 빵집을 찾아가 우유도 없이 점심을 길에서 해결하고, 그 천 원마저 없을 때는 비락 식혜로 한 끼를 때우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식혜엔 밥풀이 들어 있지 않느냐며,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니까 식혜가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시시덕거릴 여유가 있었다. 얼마나 여유가 있었는지 심지어 연애도 했다. 딱 나처럼 부모한테 학비도 생활비도 기대할 수 없어서 악착같이 살던 사람과 많이 걸었다. 실없는 농담과, 걸을 수 있는 길과, 길거리 떡볶이만 있으면 우리는 그늘 없이 웃을 수 있었다. 학교를 그만둘 때도 그랬다. 없이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없이 사는 게 그렇게 겁나지 않았다. 월급이라는 길고 질긴 목줄에 매여 어딘지 모를 곳으로 질질 끌려 다니다가 숨이 끊어질 것 같아서 멋있는 핑계, 그럴싸한 명분을 붙여 도망쳐 나왔다. 우리 어머니가 그때부터 며느리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은 좀 죄송스런 일이지만 정작 목줄을 자른 가위는 바로 그 며느리였다. 돈 없이 즐겁게 연애를 할 수 있었던, 집을 팔자마자 시세가 폭등해도 초연할 수 있었던 그 사람은 신발바닥에 붙은 껌을 떼 주듯이 그만두라고 했다. 덕분에 더 이상 고민하는 척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당연히 수입은 줄고 삶은 불안정해졌다. 튀김을 손에 쥐고 먹은 것처럼 아무리 닦아도 불안이 손에 미끌거리는 느낌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확실히 향수어린 풍요가 찾아들 때가 있다. 이해관계 없이 사람들 만나서, 좋은 사람들 만나서 돈 안 되는 일들을 해 보자고 작당을 하고 있자면 이게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100원짜리 조립식 로봇 장난감을 들고 있을 때처럼 머릿속에서 그럴싸한 그림들을 그리고 있자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 버린다. 어디의 누군가는 숨만 쉬어도 돈이 들어서 살기가 어렵다는데 여기의 누군가는 덜 벌고 덜 쓰면서도 아직 재미있는 게 남아 있다. 나와는 달리 힘겹게 일터에서 버티고 있던 아내가 딱 학교를 그만둘 때의 나와 같은 낯빛과 표정을 지을 때, 그녀의 신발 바닥의 껌을 떼 줘야 하는 건 그런 재미를 누리던 나의 책임이었다. 당장 어떻게 살 지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 우리 어머니, 며느리 눈치 안 봐도 되시겠는데 그런 작은 문제쯤이야!
2024. 2. 9. 와우글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