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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남의 동네 놀이터2024-01-3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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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evel 10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지, 좀 무섭기까지 해. 열 서너 평 되는 집이 가운데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붙어 있고, 그 계단 위에 또 똑같은 구조의 집이 좌우 대칭으로 붙어서 총 네 집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있단 말야? 그런 연립 주택 한 채가 한 동이었어. 근데 우리 집이 몇 동 몇 호였냐 하면, 42동 102호였어. 42동. 그럼 그런 똑같은 집이 몇 채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215동이 있었던 건 확실해. 똑같은 구조의 집들이 200 채가 넘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림을 상상해 봐. 무섭지 않아? 그나마 어릴 때 우리 동네가 그렇게 공포감을 주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너비가 들쭉날쭉한 골목과 집마다 다르게 꾸민 작은 마당 때문이었을 거야. 네 집이 같이 쓰는 좁은 마당인데 어느 집은 뭐라도 먹을 걸 심고, 어느 집은 손대기 싫어서인지 시멘트로 다 발라 버리기도 했어. 우리 집처럼 적당히 꽃도 심고, 나무도 심고, 부추라도 심은 집이 제일 많았지.


우리 집은 그 주택들 중에서 좀 높은 곳에 있었는데,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돌아서 나오는 오르막에 올라가면 불쑥 시멘트 길이 끝나는 곳이 나와. 거기서부터는 산길인데 하얀 시멘트 말뚝에 ‘개발제한구역’이라고 새겨져 있었지. 초록색으로 그 글씨에 칠을 했던 것 같은데 얼마나 대충 칠했는지 글자 주변으로 막 번져 있고, 이곳저곳 다 칠이 벗겨져 있어서 영 보기 좋지 않았어. 어른들도 어쩐지 그 말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더라고. 참, 산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계속 내리막길이니까 우리 동네가 아마 산이었나 봐. 아무튼 많이들 다녀서 흙도, 길 위로 뻗은 나무뿌리도 맨들맨들한 길을 따라 한 10분쯤 걸어가면 다시 시멘트 길이 나오는데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쉽지 않은 좁은 골목이 이어졌어. 골목을 빚는 양 옆의 담장은 어린 내 눈에도 별로 높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담장 위에는 보기 싫게 시멘트를 펴 바르고 칠성 사이다와 진로 소주를 깨트려서 그 조각들을 심어 놓았어. 그거 알아? 진로 소주병은 원래 지금처럼 진한 초록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하늘색을 띄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소주병 색을 보면 아련한 느낌이 들곤 했어. 아, 이런 얘길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미안. 옛날 얘기를 하다 보면 어쩐지 신이 나서 말이지. 좁은 골목길 얘길 하던 참이었지? 그래. 그 동네 집들은 낮은 담보다 더 낮은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가지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자주 지나다녔지만 정작 그 동네 사람들은 별로 마주친 기억이 없네.


그 좁은 골목길과 낮은 담장들은 갑자기 끝나고 앞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지역이 길 건너편에 펼쳐져. 그 사이에는 좀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놀이터가 하나 있었지. 거기서 노는 아이들을 거의 본 적이 없었거든. 볕도 잘 안 드는 곳에 덩그러니 있던 그 놀이터는 그 시절 아이들처럼 방치되어 있었어. 시소의 쿠션이 되어 줘야 할 타이어는 터져 있었는데 또 그네는 의외로 멀쩡했지. 정말 그 시절 아이들처럼 말이야. 나는 주로 그네에서 적당히 흔들거리며 앉아 있었어. 그럼 바람 방향에 따라 칼칼한 쇳가루 냄새나 매캐한 용접 연기 냄새, 비릿한 꽁치 굽는 냄새가 나곤 했지. 하늘이 공장의 양철 담장처럼 빨갛게 녹이 슬면 그 담장 모퉁이에서 또 그 하늘만큼 녹슨 엄마가 나타나. 매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종종 그렇게 거기서 기다렸으니까 무슨 영화처럼 달려가 끌어안고 하진 않지만 그래도 서로 잰 걸음으로 반가움을 드러내긴 했지. 엄마는 오늘 작업반장이 엄마가 한 납땜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면서 이렇게 해야 된다고 말했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했어. 다른 사람들보다 손이 빨라서 일을 많이 한 덕에 칭찬받았다는 말도 했는데 나는 엄마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 엄마도 내가 한 말만 기억하고 있을까?


우리는 다정하게 좁은 골목과 산길을 되짚어서 우리 동네로 돌아오곤 했지만 아빠는 그런 엄마가 그렇게 마음에 들진 않았던 것 같아. 잠들 무렵에 얼핏 엄마가 집을 비우고 일하러 가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아빠의 목소릴 들었던 기억이 나. 엄마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고모한테 빌린 돈이 어떻고, 설움이 어떻고 하면서 살짝 울먹이셨어. 아빠가 조용해지고 나도 어느새 잠이 들어서 결국 끝까지 듣진 못했지만 그 뒤로도 한동안 나는 엄마를 기다리러 그 놀이터에 가곤 했으니까 어떤 합의가 있었던 거겠지?


그런 나의 일과 아닌 일과는 어느 날 갑자기 끝났어. 엄마한테는 갑자기가 아니었겠지만 그 때의 어른들이란 아이들에게 집안 돌아가는 상황이나 부모의 계획을 나누는 경우가 없었으니까 나한텐 뭐든 늘 갑자기였지. 평소에는 학교 마치고 돌아와서 엄마 마중을 나갔는데 그 날은 엄마가 집에 있었어. 엄마는 나한테 같이 공장에 가자고 말했고, 나는 별 생각 없이 따라갔는데 놀이터를 지나 공장들이 늘어선 단지까지 간 건 그게 처음이었어. 나를 공장 입구에 잠시 세워 두고는 엄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나와서는 새삼 내 손을 꼭 잡고 가자고 하셨어. 산길에 접어들어서 엄마는 못 받은 돈을 받아냈다고, 오늘은 맛있는 걸 사 먹자고 했어.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 부려먹고 돈 안 주려는 사람들은 왜 그리 많은지 몰라. 그날 저녁에 무슨 맛있는 걸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공장을 바라보던 그 놀이터에서의 기다림은 그게 마지막이었어. 엄마가 적어도 공장에는 다시 나가지 않았으니까.


어때? 제법 생생한 기억이지? 나도 내가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문득 어느 엄마의 가난과 설움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하니까 그 때와 그 곳들이 막 밀려오지 뭐야. 그냥 그 밀물 속에 실려 온 것들을 거르지 않고 들려주고 싶었어. 사실 잘 거를 줄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신나서 이야기한 건 좀 오랜만이야. 얘기하다 보니까 그 때는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 궁금해지기도 하네. 우리 엄마는 왜 국민학교 4학년 밖에 안 된 나를 공장에 데려갔던 걸까? 든든해서였을까, 마음이 밀리지 않으려고 그어 둔 선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울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 이제 와서 물어 볼 수는 없지. 우리 어무니는 그 때 이야기를 하면 내가 풀어 드릴 수 없는 매듭을 품은 표정을 지으신다니까? 한참 어릴 때 자식 외롭게 했다고 하면서 없이 살아서 상처를 줬다고 울먹거리시니까 나는 농담으로도 그 때 이야기를 못 꺼내겠더라고. 그리고 놀이터에서 기다리던 나를 보고 환하게 웃던 엄마의 얼굴을 지금 머리가 커서 떠올려 보니 그게 그냥 반가운 웃음만은 아니었던 걸 알게 돼서 아마 지금 우리 어무니랑 얘기하려면 나도 울상을 짓게 될 것만 같아. 당신 삶을 지우고 자식한테 당신 몫까지 다 내어 줬으면서 엄마는 뭐가 그렇게 미안했던 걸까? 우린 그냥 좀 가난했을 뿐이었는데.


2024. 1. 17. 와우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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