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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마당에서2024-01-3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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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evel 10


“좋네.”

“그러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햇살은 이어졌다. 같은 빛을 맞으며 우리는 살짝 눈을 감았다. 우리는 이사하고 처음 맞이하는 봄에 캠핑 의자를 샀다. 캠핑이라곤 생전 가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가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너무 뜨거운 때가 오기 전에 마당에 나와 볕을 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비의 효과를 톡톡히 즐기면서 나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떠올렸다. 정말 햇살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느지막이 먹은 아침식사로 배가 불렀고, 방금 내린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자니 만족스러워서 그렇겠지. 그래도 정면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없었다면 그런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으리라.


우연히 아이들과 가끔 찾던 공원 근처에 빈 집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되어 그저 호기심에 들러 본 집은 희한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전혀 이사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어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니 이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 그 집이 떠오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 한 분이 쓰다가 도시 사는 아들 집으로 가셔서 제법 오래 방치되어 있던 낡은 슬라브 주택.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집을 다시 찾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남향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난방에 도움이 된다는 경제적인 이야기를 먼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저 볕이 잘 드는 집에서 살아야 했다. 방위를 확인하고 나서 생각해 보겠노라고 부동산에 말해 놓고서 나는 초조해졌다. 몇 년째 나가지 않은 집인데 머뭇거리다가 놓칠 것만 같아서 자꾸 아내를 재촉하게 됐다. 계약하고, 잔금을 치르고,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공사 기간이 늘어져 채 마무리도 안 된 집에 이사를 들어가 살면서 마무리를 하고, 겨울을 지냈다. 거실 창으로 깊이 들어오는 겨울 햇빛에 감사하면서 봄을 기다렸다.


나는 나약한 사람이란 걸 일찌감치 알았다. 어릴 때 정신 빼 놓고 읽던 만화책 속 주인공들은 몸이 부서져 가면서도 불굴의 의지와 정신력으로 위기와 위협을 이겨 내고 영광을 차지했기에 나도 강인한 정신력을 갖게 되면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될 줄 알았지만 웬걸, 나는 하늘이 구름에 덮여있기만 해도 기분이 처지고 비가 주구장창 내리는 장마 기간에는 기운도 없어지는 나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여름 더위에 짜증을 내면서도 가을이 되어 해가 짧아지면 급격히 우울해지는 경험을 쌓게 되면서 나는 특히 햇빛의 양에 크게 흔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에서 자취할 때 반지하나 건물에 둘러싸여 종일 볕이 들지 않는 방을 전전했으니 우울하고 비관적인 색이 얼굴에 물들어 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말에 몸이 부쩍 좋지 않아서 해야 할 일들을 계속 미루게 되었다. 몸은 곳곳이 삐걱거리고, 회복은 더디고, 체력은 돌아오지 않아 잠시 일하고 숨을 고른다. 이 정도면 몇 시간이면 하겠거니 했던 일들이 며칠이 걸리고, 그런 내가 한심하고 서러워 울적해 질 때, 나는 그날의 마당을 기억한다. 그날의 햇살을 떠올린다. 온 몸에 아낌없이 쏟아주던 그 빛의 움직임, 솜털을 간질이고 그 아래 피부를 찌릿찌릿 자극하던 감각을 그리워한다. 내 피부를 파고들던 그 입자들의 침입을 기다린다. 그렇게 마당에 앉아 태양을 마주하고 있으면 힘이 날 것만 같다. 아프지 않을 것 같다.


2024. 1. 11.  와우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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