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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나무2020-07-04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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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evel 10

        나무

                   - 2003. 1. 1. (결혼축시)


하나된 묘목을 여기 심다

옛 이야기의 콩나무처럼
내일 아침에 하늘까지 닿아있지 않아도 좋다
병치레나 벌레들의 괴롭힘이 없지도 않으리
그저

벼락을 맞더라도
통째로 불타오를 지언정 쪼개지지 않기를
그래서 어느 봄날 깜짝 놀라며 새싹을 발견할 수 있기를
이왕이면

남들 모르더라도 조금씩 풍성하게 자라서

지친 여행자가 땀을 씻으며
은밀한 보금자리를 찾는 연인이 등걸에 기대어 속삭이며
굽은 허리를 짊어진 할머니가 기대어 먼 데를 보며
철없는 아이들 놀다가 놀다가 까무룩 잠이 들 수 있도록
풍성한 그늘을 드리우기를

미운 손도 좋은 손도 작은 손도 큰 손도 뻗기만 하면 집을 수 있는
낮은 가지에 열매를 맺어 주기를
기린이 목을 뻗어 즐거이 찾을 수 있는
꼭대기 높은 곳에도 먹음직스런 새 잎을 준비하기를
목마르나 두 손을 잃은 자가 바라는
잎새에 시원하니 맑은 이슬을 모아두기를

청년이 제 키로 볼 수 없는 풍경을 보며
개구진 꼬마들이 한 껏 힘을 기르도록 장난치며
날벌레가 지친 어깨를 늘어뜨려 쉬며
새들이 짹짹이는 꽃같은 둥지를 틀도록
믿음스러운 가지를 태양을 향해 뻗어내기를

보이지 않아도
강요받지 않았어도 깊이 내려뻗어 박힌 뿌리와
키워내는 그 줄기의 활발한 운동과
노래하는 이파리의 호흡으로
서 있기를

먼 후에라도
볼 수 없는 먼 후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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