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산책 - 2016. 3. 15.
호반을 걷는다 포장된 산책로를 애써 피해 흙을 밟으며 불안을 신고 걷는다
냉이가 꽃대를 올리고 매화가 크리스마스 장식등처럼 주렁주렁 열려도 카페 앞 벤치 한 잔에 삼천원 하는 커피 한 잔을 나눠 마시는 머리 허연 부부가 뿌리처럼 덮은 무릎담요를 보며 나는 내복을 벗을 자신이 없다
걷다가 그저 편해서 그저 편해서 앉은 벤치 옆에는 스피커가 서 있어 누구도 거슬려하지 않을 음악들이 쉼 없이 달리는데 나는 마침 이 곡의 제목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벤치처럼 바닥에 못 박혀 낡아간다 분연히 일어서자니 호수는 바람이 불어 흔들려도 갇힌 물이어라 누구도 흐르지 않음을 탓하지 않는데 조바심을 낼까 내 눈 앞의 물결은 아까의 노부부도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보이리라
해가 지고 추워지면 얇은 외투를 여미고 지금 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일어서겠지 나는 어쩌자고 호수에 왔나 크고작음에 관계없이 업신여기거나 주눅들지 않는 나무를 보고 취하려 했나 오르내리는 물결을 보면서 평화를 훔치려 했나
바람이 더 불고 수면이 끓어오른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일어서야 한다 아직 하고 말해야 한다 사람 손으로 낸 길을 지나 백사장을 넘어 검은 바위가 서 있고 낯선 얼굴들이 낚시를 하고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즐기는 호반을 마저 걸으리라 건강에 좋다 해도 맨발로 걷지는 못하리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나의 산책을 끝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