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부터 마음이 답답해서 불쑥 산청요에 왔다.
아름다운재단에서 만든 노트를 처음 꺼내 들고 첫 장을 당연하다는 듯 넘기고 다음 장을 펼쳤다. 나는 왜 첫장을 비우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만년필로 끄적인 다음 그럴싸해 보여서 사진도 찍었다.
나는 첫 페이지를 비우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아침부터 꽉 채워진 일정을 싫어하듯이 말이다. 어떤 일을 기획할 때도 처음부터 꽉 채워서 계획하는 건 싫다. 번뜩이는 이미지 하나에 디테일을 더해 가다가 의미를 부여하고 당위성을 채우는 경우가 많다. 의미부여가 안되고 당위성도 없으면 이미지는 그냥 버려도 되는데 애초에 당위성에서 출발한 일들은 버리지도 못하고 끌려가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일까?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을 수록 멍하니 바라보는 풍광이 좋다. 맞은 편 산에 구름 그림자가 살짝 드리워져 있고 그림자 사이로 빛이 닿는 부분은 싱그러운 초록이다. 구름이 흘러 가면서 그림자가 이동하고, 빛이 닿는 부분이 움직이면서 시선을 이끈다. 끌려가야 한다면 이런 식이면 좋겠다.
다시 사진을 한 장 찍는다. 하늘을 절반 담는다. 여백을 담아 오전을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