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학교에서 일하는 혹은 일하던 꿈을 자주 꾼다. 코로나로 급변하는 정책들과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학교 생활,
방역과 온라인 수업이 병행되는 탓에 과중한 업무들로 고생하는 아내를 곁에서 보면서도 여전히 학교가 그리운 탓이리라. 내가
그리운 건, 그래서 꿈에 자주 나오는 건 학생들과 스스럼 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수업시간이건 수업 외의 시간이건 불쑥 뭔가
질문하기도 하고 싱거운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가끔은 눈물을 글썽이며 속을 털어 놓는 그 순간들을 나는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휴일이나 밤 늦은 시간에도 학생들의 전화 혹은 카톡에 시달리는 아내가 부럽고 질투나기까지 한다. 지금의
나는 명왕성이란 곳에서 청소년들을 만나며 생활하고 있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와는 사뭇
디르다. 불편하지 않게 해 주려고 무언가 요구하지 않고 말 걸기를 조심스럽게 하다 보니 명왕성에서 청소년들이 다가오는 일이 거의
없다. 뭐라 불러야 할 지 몰라서 애매하게 "저기요~"하며 다가오는 건 분명 뭔가 필요할 때 뿐이다. 그들의 행동이나 대화를
지켜보다 눈치껏 필요한 걸 챙겨주거나 한 두 마디 섞어 보는 노력도 해 보지만 이게 또 자신들이 감시받거나 이야기를 훔쳐 듣는다는
인상을 줄까 두려워 섣불리 시도하기도 어렵다. 올해는 청소년들과 더 가까워 지기 위해 같이 놀고 여행가는 프로그램들도 준비하고
있지만 이게 얼마나 먹힐까 하는 의심도 든다. 그래서 다시 교사와 학생의 관계와 무언가를 알려주는 행위가 갖는
문자 이상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교사는 해당 지식에 대한 전문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이를 바탕으로 학생의 신뢰를 기본적으로
획득한다. 이것은 수업이나 학생들과의 교류 속에서 교사의 실질적인 실력과 태도에 의해 쉽게 강화될 수 있고, 신뢰받는 경험을 통해
교사는 자존감을 키워 나간다. 오만함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면 교사는 자신의 교수법과 성의어린 태도에 확신을 가지고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재밌는 건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공부라는 점이다. 서로에게 스트레스인 경우가 많다
해도, 아니 서로에게 스트레스이기 때문에 더 쉽게 그들이 연합하고 유대를 쌓게 해 준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분야를 꿰뚫고
있는(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사람을 바라보는 존경과, 그가 자신이 가진 최선의 방법으로 가르치려는 모습을 볼 때 자연스레 쌓이는
감사는 긴 시간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를 갖게 되는 학교 환경 속에서 손쉽게 친근함을 생성시켜 낸다. (그 과목은 싫은데 그
수업은 좋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이 순간이다.) 전에 여기까지 생각을 했더라면 나는 그래도
학교를 그만둘 수 있었을까?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고, 추구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해도 나는 안정적인 걸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누리던 학생들과의 벅찬 시간이 학교라는 틀 안에서만 쉽게 누리는 것이란 걸 알았어도, 그것을 이렇게 그리워하게
될 줄 알았어도 나는 학교를 나섰을까? 아마 그래도 나왔을 것 같다. 나도 학생들과 함께 졸업하고 싶었으니까. 학교 밖으로
내딛는 두려운 걸음을 같이 걸으며 씩씩한 척 해 주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처럼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이리라. 졸업했으니까.
교사 입장에서야 학교가 학생들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환경이긴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선 사람마다 선생님에게 한 마디 건네는 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다. 교실에서, 복도에서, 식당과 운동장에서 그런 용기를 내어 준 제자들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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